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22일 개최된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외교장관 특별회의가 태국과 캄보디아 간 국경 분쟁 해결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지난 8일 재점화된 양국의 무력 충돌은 민간인 사상자와 52만5천여 명의 대규모 난민을 발생시키며 심각한 인도주의 위기로 번지고 있다.
이번 회의는 11일 말레이시아의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 총리와 캄보디아의 훈 마넷(Hun Manet) 총리, 태국의 아누틴 찬비라쿨(Anutin Charnvirakul) 총리 간 3자 합의로 전격 소집됐다. 의장국 말레이시아의 모하마드 하산(Mohamad Hasan) 외교장관 주재로 열린 회의에는 태국의 시하삭 푸앙켓케오(Sihasak Phuangketkeow) 외교장관과 캄보디아의 프락 소콘(Prak Sokhonn) 부총리 겸 외교장관이 충돌 이후 처음으로 대면했다.
분쟁은 프레아 비헤아(Preah Vihear) 사원을 중심으로 한 국경 지역에서 시작됐으나, 현재는 타 모안(Ta Moan)과 타 크라베이(Ta Krabey) 사원 일대로 확산됐다. 양측은 F-16 전투기 공습과 다연장 로켓포를 동원한 전면전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800km에 달하는 국경선 전역이 전장으로 변했다. 20일에는 태국 공군의 폭격으로 캄보디아 오칙(O'Chik) 교량이 파괴되는 등 전략 시설에 대한 공격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캄보디아 측은 태국군이 유독성 가스를 살포했다고 주장하며 국제사회의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캄보디아 국방부는 현지 병원에 입원한 군인들이 호흡 곤란, 구토, 피부 발진 등 화학무기 노출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태국 공군은 이를 전면 부인하며 산불 진화용 난연제나 연막탄을 오인했다고 반박했다. 양국 모두 화학무기금지협약(CWC) 가입국인 만큼, 국제화학무기금지기구(OPCW)의 현장 조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인도주의적 피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캄보디아 내무부는 21일 기준 52만5천231명의 민간인이 피란길에 올랐다고 집계했다. 태국 측도 국경 마을 주민 40만여 명을 대피시켰다. 캄보디아 측 사망자는 민간인 19명을 포함해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태국군도 22명의 전사자가 확인됐다. 주택 103채, 학교 5개, 사원 5개가 파괴됐고, 세계에서 지뢰 밀도가 가장 높은 캄보디아 국경 지역의 지뢰 표식이 유실되면서 추가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번 분쟁의 뿌리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4년 프랑스와 시암(태국) 간 조약은 국경을 당렉 산맥(Dangrek Mountains)의 분수령을 따르기로 했으나, 1907년 프랑스가 제작한 지도에서 프레아 비헤아 사원을 캄보디아 영토로 표기하면서 모순이 발생했다.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태국이 장기간 해당 지도를 묵인했다는 점을 들어 사원의 소유권이 캄보디아에 있다고 판결했고, 2013년에는 사원 주변 4.6㎢ 분쟁 지역도 캄보디아 영토임을 명확히 했다.
양국 지도부의 정치적 상황도 분쟁 확대에 영향을 미쳤다. 지난 9월 헌법재판소의 패통탄 총리 해임 이후 집권한 아누틴 총리는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군부와 보수 세력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이다. 2023년 아버지 훈 센으로부터 권력을 승계한 훈 마넷 총리 역시 군부의 충성을 확보하고 강한 지도자상을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경제적 파장도 심각하다. 주요 교역로인 포이펫(Poipet)-아란야프라텟(Aranyaprathet) 국경 검문소가 사실상 폐쇄되면서 연간 47억 달러 규모의 육상 무역이 중단 위기에 처했다. 8월 기준 캄보디아의 대태국 수입은 전년 대비 29.1%, 수출은 36.2% 감소했으며, 분쟁이 격화된 10월 이후 추가로 30% 이상 급락했다. 포이펫 경제특구에 입주한 한국, 일본, 태국 기업들의 생산 활동도 중단됐다.
미국과 중국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입하고 있다. 마르코 루비오(Marco Rubio) 미 국무장관은 양국에 전화를 걸어 휴전 합의 이행을 압박하고 말레이시아에 위성 정보를 제공했다. 중국은 덩시쥔(Deng Xijun) 아시아 사무 특사를 파견해 셔틀 외교를 전개하며 일대일로(BRI) 핵심 거점인 캄보디아를 지원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11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무력 충돌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즉각적인 대화 복귀와 국제법 준수를 촉구했다. 한국은 태국, 캄보디아 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아세안 의장국의 중재 노력을 지지하는 균형 외교를 펼치고 있다. 특히 캄보디아 국경 도시에 만연한 취업 사기와 감금 범죄로 인해 한국인 피해자들이 분쟁 지역에 고립될 위험이 제기되면서, 한국 외교부는 4일 포이펫, 바벳 등을 여행경보 4단계로 격상했다.
이번 특별회의는 말레이시아가 위성 이미지와 아세안 옵저버 팀의 현장 보고서를 제시하며 양측을 압박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태국은 아세안의 내정 불간섭 원칙을 방패 삼아 양자 해결을 고집하고 있어, 실질적인 돌파구 마련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국제사회는 검증 가능한 휴전 메커니즘 수립과 아세안 감시단 파견을 통한 단계적 해결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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