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을 흔드는 시리아인들 /알자지라 보도영상 캡춰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시리아를 '2025년 올해의 국가'로 선정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우리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 서게 된다. 과연 평화란 무엇인가. 13년간 50만 명이 죽고 600만 명이 고향을 떠나야 했던 땅에서, 단 1년 만에 300만 명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시리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비상계엄이라는 헌정 위기를 6시간 만에 무력화시킨 것, 브라질이 쿠데타 주모자에게 27년형을 선고한 것, 아르헨티나가 파탄 직전의 경제를 1년 만에 정상 궤도로 올려놓은 것. 이 모든 사건이 우리에게 묻는다. 위기 속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회복하는가.
◆ 복수가 아닌 정의의 선택
아흐메드 알 샤라 대통령이 집권 직후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복수가 아닌 정의." 알카에다 출신이라는 과거를 가진 그가 여성 인권 운동가를 장관으로 임명하고, 히잡 착용 의무를 폐지하고, 세속적 자유를 허용한 것은 계산된 실용주의일 수 있다. 국제사회의 제재 해제와 경제 재건을 위해서는 서구적 가치를 수용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기가 아니라 결과다. 300만 명의 난민이 돌아온 이유는 전쟁이 끝났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돌아가도 보복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에 귀향을 선택했다. 유엔난민기구 필리포 그란디 대표의 표현처럼, 그들은 "발로 투표"했다. 어떤 경제 지표도, 어떤 선언문도 이보다 강력한 평화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분쟁 후 사회가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다. 시리아는 아직 완벽하지 않다. 소수 종파에 대한 학살로 2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슬람국가 잔당의 위협은 여전하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도 미흡하다. 그럼에도 시리아가 "지옥에서 평범한 국가로"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 제도가 작동할 때 시민은 움직인다
한국의 사례는 또 다른 교훈을 준다. 12월 3일 밤 10시 27분,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때 많은 이들이 1980년 광주를 떠올렸다. 그러나 2024년의 한국은 1980년의 한국이 아니었다. 국회의원들은 담장을 넘어 의사당으로 들어갔고, 시민들은 맨몸으로 군 병력을 막아섰다. 새벽 1시, 190명 전원 찬성으로 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됐다.
여기서 핵심은 헌법이라는 제도가 실제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6월 3일 조기 대선을 통한 정권 교체, 7월 계엄법 개정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 대응 시스템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줬다.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11월 수출액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것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정치적 리스크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선택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에게 27년형을 선고한 것은 남미 정치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20세기 내내 군부 쿠데타와 불처벌의 악순환을 겪었던 브라질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룰라 대통령이 보우소나루 사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천명한 것은 이 원칙을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 변화의 진폭이 주는 의미
이코노미스트가 시리아를 최종 선택한 이유는 '변화의 진폭' 때문이다.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었고, 시스템이 붕괴될 뻔한 위기를 원상복구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각각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부분적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시리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에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평범한 나라"로 국가의 운명 자체가 180도 바뀌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국제사회는 흔히 '실패한 국가(Failed State)'를 포기한다. 소말리아처럼, 아프가니스탄처럼, 예멘처럼. 그러나 시리아는 회복 불가능해 보이던 국가도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개입과 지원이 이뤄지면 되살아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미국의 조건부 제재 해제, 유엔 안보리의 제재 해제, 캐나다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는 모두 알 샤라 정부가 보여준 실용주의적 변화에 대한 보상이었다.
◆ 민주주의, 인본주의, 자연주의의 교차점
시리아 여성들이 자유롭게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 다마스쿠스 밤거리에서 파티가 열리는 장면은 단순한 자유의 확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존엄성 회복이다. 극단주의가 억압했던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와 표현이 되살아나는 과정이다.
룰라 대통령이 아마존 삼림 벌채를 획기적으로 둔화시킨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자연에 대한 착취를 멈추고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단순한 환경 정책이 아니라, 인류가 지구라는 생태계 안에서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담장을 넘을 때, 시민들이 거리로 나올 때, 그것은 제도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였다. 시리아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들을 움직인 것은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집으로 가고 싶다"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욕구였다.
◆ 남겨진 과제들
물론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시리아는 여전히 소수 민족 탄압과 테러 위협에 시달린다. 한국은 민주주의 지수가 22위에서 32위로 떨어졌다. 브라질은 의회와 행정부가 충돌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밀레이의 급진적 긴축으로 빈곤율이 한때 52.9%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회복이란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두 걸음 나아가고 한 걸음 물러서며, 때로는 비틀거리면서도 전진하는 것. 그것이 인간 사회의 진보다.
2025년 '올해의 국가' 선정이 주는 궁극적 메시지는 이것이다. 아무리 깊은 절망 속에서도, 올바른 리더십과 깨어있는 시민, 그리고 작동하는 시스템이 있다면 회복은 가능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회복이 복수가 아닌 정의 위에, 억압이 아닌 자유 위에, 착취가 아닌 공존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300만 명의 시리아 난민이 집으로 돌아간 이유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GDP 성장률을 보고 돌아오지 않았다. 외교 관계 정상화를 확인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두렵지 않다"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돌아왔다. 평화란 결국,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삶 아닌가.
시리아의 기적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귀환한 난민들에게 일자리와 주택을 제공하고, 파괴된 인프라를 재건하고,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긴 여정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적어도 2025년, 세계는 목격했다. 지옥도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가장 어두운 밤에도 새벽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인간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시리아 #평화 #민주주의 #인간존엄 #회복탄력성